[평신도 영성 나는 평신도다] (1) 시작하며 - 단 한 평신도의 힘

강세종
2018-12-18 11:01
조회수 294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것 같아서 가톨릭평화신문에 연재되고 있는 정치우 안드레아 교장 선생님의 글을 이곳에 전재하겠습니다.

[평신도 영성 나는 평신도다] (1) 시작하며 - 단 한 평신도의 힘

단 하나가 모든 것을 바꿉니다.

딱 물고기 한 마리일 뿐인데…. 노르웨이 어부들은 바다에서 잡은 물고기를 저장하는 탱크 속에 천적 물고기 한 마리를 넣는다고 합니다. 그러면 다른 물고기들이 죽지 않는다고 합니다. 작은 긴장감 하나가 많은 생명을 살립니다. 이렇게 딱 ‘1’의 차이에 따라 삶의 방식이 바뀌고, 물고기를 얻느냐 잃느냐가 갈라집니다.

그렇습니다. 1, 하나, 한 시간, 하루, 한 문장의 글, 한 사건의 위력이 대단합니다. 개인적 평화를 얻기 위해 아무리 영적 수련에 나선다고 해도 한 장의 조간신문에 평정심이 흔들리고, 한나절의 외출에서 속상한 일이 생겨 이웃을 비방하는 것이 우리입니다. 그 속을 알 수 없는 한 길 마음을 가진 딱 한 사람 때문에 딱 한 번 주어진 삶이 힘들고, 내가 가진 딱 하나의 악습 때문에 괴롭습니다. 한 그루 나무 열매 하나에 대한 딱 한 번의 흔들림으로 낙원을 잃은 것이 인류 아닙니까.

그래서 1, 하나에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 10,30) 2가 아니고 1입니다. 그 유일한 한 분을 닮게 창조된 우리도 하나입니다. 유일무이하게 소중한 존재입니다.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 18,14) 우리 각자 하나가 우주 전체보다 더 무겁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도 하나입니다. 둘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딱 한 시간만이라도 함께 깨어 있어 달라고 요청하십니다.(마태 26,40 참조) 예수는 또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루카 17,6) 예수님은 겨자씨 두 알의 믿음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딱 한 알만한 믿음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일반적으로 2, 3, 4, 5, 6…을 추구합니다. 돈과 성공, 권력, 명예, 쾌락…. 하나가 아닌 더 많은 것을 얻으려 합니다. 하나이신 하느님에 대한 믿음 하나면 충분합니다. 하나를 알면, 종말의 그 날 우리는 머리카락 한 올도 잃지 않을 것입니다.(루카 21,18 참조)

남자 여섯 명이 추위에 떨면서 산속에서 구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모닥불이 꺼져갔습니다. 불이 꺼지면 이들은 죽을 운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 각자는 불을 지필 장작을 하나씩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불을 피우지 못하고 모두 동사(凍死)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첫 번째 남자는 일행 중에 흑인이 있어서 자신의 장작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흑인에 대한 편견이 심했던 남자는 흑인을 위해 희생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 남자는 가난했습니다. 그는 반대편에 앉아 있는 부자가 싫어서 희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부자가 먼저 가난한 자신을 위해 희생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세 번째 부자 남자는 원래 장작을 내어줄 만큼 자선적이지 않았습니다. 그가 장작을 내어줄 사람이었다면 부자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네 번째 남자는 일행 중에 같은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없어서 장작을 내놓지 않았습니다. 다섯 번째 남자인 흑인도 장작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흑인이라는 이유로 장작을 사용하지 않은 백인에게 복수해야 했습니다. 여섯 번째 남자도 장작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도움을 주는 이들에게만 베푸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아무도 장작을 사용하지 않자, 그 또한 장작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이 얼어 죽은 것은 외부의 추위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내면의 추위 때문이었습니다. 장작을 내놓는 따뜻한 단 한 명, 진정한 의미에서의 단 한 명의 평신도가 없어서였습니다.

이제 평신도의 의미와 역할, 소명에 대한 긴 탐색에 들어갑니다. 글의 도입과 전개 과정은 아직 안갯속에 가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 탐색의 종착점은 알고 있습니다. 아마도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으로 유일무이한 하느님을 고백하는 1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희망이 될 것입니다.

정치우 (안드레아, 새천년복음화학교 교장)

가톨릭평화신문 2018.12.09 발행 [1493호] 게재문 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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