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영성 나는 평신도다] (6)평신도의, 평신도를 위한, 평신도에 의한 태동

강세종
2019-01-11
조회수 4055

[평신도 영성 나는 평신도다] (6)평신도의, 평신도를 위한, 평신도에 의한 태동

평신도들의 자부심이자 본보기, 정하상

조선 후기. 혼란의 연속이었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면에서 먹구름이 한반도를 뒤덮고 있었습니다. 세도정치로 인해 정치 기강이 극도로 문란해진 탓에 매관매직이 성행하고 지방관들은 자신의 욕심 채우기에만 급급했습니다. 자연재해가 빈번했고 전염병이 유행했으며, 문란해진 수취제도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소작농이나 화전민으로 전락하고 있었습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우던 그 시절, 중국의 서학서들을 신앙의 씨앗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암울한 현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신앙에서 발견합니다.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마태 4,16)

평신도 거인들의 역사

그렇게 이 땅의 백성들은 성직자의 도움 없이 영적 독서를 통해 스스로 평신도가 됐고, 스스로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이처럼 한반도 복음화의 역사는 영국의 역사가 토머스 칼라일(Thomas Carlyle, 1795~1881)의 말을 빌리자면, ‘평신도 거인들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그 거인은 한두 명이 아니었습니다. 그중에서 유독 눈에 띄는 평신도가 정하상 바오로 성인입니다. 올해가 정하상 바오로 성인의 순교 18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지만, 그의 삶이 오늘날 평신도들에게 큰 모범으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정하상(丁夏祥) 바오로 성인은 1795년 경기도 양근 마재에서 정약종(아우구스티노, 정약용의 형)과 유 체칠리아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그곳에서 성장하였습니다. 부친은 1801년 신유박해 때 맏아들이었던 정철상(가롤로)과 함께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어 순교하였습니다. 부친과 형이 순교한 후 정하상은 누이 정혜(엘리사벳)와 함께 신앙생활뿐 아니라 신학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그의 평신도 사도직 행보는 고난 속에서 빛났습니다. 1801년 신유박해로 중국인 주문모 신부와 함께 평신도 지도자들을 잃은 한국 천주교회가 좀처럼 부흥의 계기를 찾지 못하고 오랫동안 방황하고 있었을 때 정하상은 유진길(아우구스티노), 현석문(가롤로) 등과 함께 흩어진 신자들을 찾아 신앙을 불태우며 교회 재건에 열중했습니다. 더 나아가 한국 교회에 성직자들을 파견해 주도록 북경의 주교를 상대로 성직자 영입 사업을 활발히 추진하였습니다.

이처럼 평신도의 자발적 노력을 통해 로마 교황청 포교성성은 1831년 조선교구를 설정하기에 이르렀으며, 이후 중국인 여항덕 신부,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앵베르 범 주교, 모방 나 신부, 샤스탕 정 신부 등 선교사들이 속속 한국땅에 들어오게 됩니다.

순교로 신앙 증거

그 과정에서 있었던 성인의 고충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후 1839년 7월 12일 체포된 정하상은 미리 준비한 최초의 호교적 작품인 「상재상서(上宰相書)」를 올려 박해의 부당함을 항변했으며, 결국 그해 9월 22일 부친과 형이 순교했던 서소문 밖에서 순교로 신앙을 증거했습니다.

한국 교회가 이처럼 위대한 성인 평신도를 모실 수 있는 것은 큰 기쁨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한, 성인은 오늘을 살아가는 이 땅의 평신도들에게 자부심이자, 본보기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지금 맛보는 신앙의 열매는 모두 정하상을 비롯해 수많은 평신도가 이 땅에 씨를 뿌렸기 때문에 가능할 것입니다. 그분들의 땀과 눈물이 없었다면 어쩌면 우리는 아직도 어둠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역시 하느님은 평신도의 눈물을 못 본 체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평신도가 평신도의 역할, 씨 뿌리는 역할을 제대로 하는 한 말입니다. “눈물로 씨 뿌리던 이들 환호하며 거두리라.”(시편 126,5)

정치우 (안드레아, 새천년복음화학교 교장)

가톨릭평화신문 2019.01.13 발행 [1498호] 기사 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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